◎ No, 134 ◎ 이름: 한상길 ◎ 2001.9.27(목) 11:38, 150.150.88.234 ◎ 조회: 66

빈틈있는 친구가 좋다   site에 처음 들어 왔네요 예전에 말은 들었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게시판 분위기네요 딱딱하고 재미없어요 soft 상큼한 refreshing...... 이런글이 많았으면 좋겠지요? 자, 우리모두 그런 분위기로 만들어 갑시다! 저부터 노력하겠습니다. (시간 많은 사람만 읽어 보세요) 친구 1. 녀석을 처음 만난 건 군대에서였다.  쪼그리고 앉은 채 내게 “몇 살이 냐”고 퉁명스럽게 물었고 내 대답이 자기와 같은 나이이자 대뜸 “ 친구하자”고 했다.  8개월 고참이 그렇게 말할 때 아직 팔목 하나 맘대로 못 움직이는 신병이라면 누구나 반갑기는커녕 난감하기만 할 게다.  나도 그랬다. 알고 보니 녀석은 한국에서는 1년도 살지 않았다.   영국 미국을 부모따라 떠돌면서 ‘가방끈’은 아주 길었다.   뺀질거리는 오렌지족, 그때까지 외국에 살다온 젊은 또래들에 대해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근데 녀석은 달랐다.   쓰레기 치우고 땡볕에 1만평이 넘는 잔디밭을 벌초하고 한 겨울 얼어붙은 눈을 삽으로 잘도 깼다.   친해져 말도 놓게 됐을 때 내가 “영주권도 있는데 군대는 왜 왔느냐” 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어딜 가도 난 소속이 없잖아.   나랑 같다고 여겨주는 사람들 있는 곳에 와보고 싶어서”였다. 녀석은 지금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다.   무슨 어려운 제목의 연구소 연구교수로 말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실험실에서 잡은 모르모트만 해도 5000마리는 된다는 분자생물학자다. 친구2. 또 하나의 녀석은 머리털이 하나도 없다.   소위 스킨헤드, 우리말로 빡빡머리를 하고 결혼식장에도, 장레식장에도 떳떳하게 나타난다.  대학 중퇴, 공부하고 싶지 않아서 중퇴한 건 아니다.   국립대 중에선 제일 좋다는 서울에 있는 모대학을 다니다 그만뒀다.   그리곤 일찌감치 벤처 기업을 기웃거렸다.   7-8년 전이니까 그땐 벤처 기업이라는 잘 나가는 명칭도 없는 컴퓨터만 잔뜩 쌓인 다락방 회사였다. “뚝딱뚝딱, 고민고민, 꾸벅꾸벅” 그 동안 뭐했냐고 물으면 녀석이 답하는 말이다. 맨날 다 떨어진 청바지에 한참 유행이 지난 티셔츠를 땀냄새 나도록 입어 옆 사람이 얼굴을 찡그릴 정도인데도 이 무신경한 녀석은 코방귀도 끼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너무 자주 자르는 번거로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몇 년 전 머리털을 밀어버렸다. 얼마 전 녀석에게 엄청난 대박이 터졌다.   스톡옵션으로 받은 주식값이 50억원을 넘었다.   그 소식을 듣자 나는 녀석이 멋진 차를 사고 멋진 집을 사고 멋진 옷을 사서 보란 듯이 유람이나 다닐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녀석은 여지없이 내 상상을 부숴버렸다.   더욱 파래진 스킨헤드, 땀에 젖은 티셔츠, 실밥 뜯겨진 청바지 차림에 “어디다 도서관이나 하나 짓고 싶다”고 녀석은 말했다.   역시 여전히 뚝딱뚝딱, 고민고민, 꾸벅꾸벅이라고 근황을 알려준 건 물론이다. 친구 3. 마지막 녀석은 결혼을 일찍 했다.   녀석은 만나기만 하면 연봉을 묻는다.   재테크와 골프, 술집과 스트레스, 마누라와 살림살이에 대한 녀석의 얘기를 듣다 보면 한숨이 나오다가도 그게 자랑인지 자만인지 혹은 위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 얘기가 끝나면 내 얘기를 묻고 “골프 하기는 워낙 여유 없이 빠듯한데 뭐” “골프, 하려면 일찍 하는 것이 낫더라!…” 재테크는 남는 돈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라는 대답을 하면 안 그래도 튀어나온 배를 더욱 앞으로 내밀며 “그건 그게 아냐.  조금씩 재테크를 해야지”라고 훈계를 한다.   한 갑의 담배와 양주만 있으면 아마도 녀석은 내가 아니라 누굴 만나도 만족할 듯하다. 녀석은 “사람은 나이에 맞는 행동과 능력과 위치를 가져야 한다”는 신조를 갖게 돼 버렸다.   도대체 마누라와 아들과 직업과 골프가 마치 자신을 치장하는 장식품이라도 되나? 친구들과의 만남. 나는 친구 1과는 E메일로 만난다.  얼마 전 녀석에게 E메일이 왔다.   ‘여긴 맥주 한잔 하면서 사는 게 뭔지를 물어볼 만한 푼수 친구가 없다. 안녕.’ 친구 2와는 자주 만난다.   녀석이 워낙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사니까,   평범한 나 정도는 너그러이 봐줄 줄 아니까.   친구 3과는 결혼식장이나 장레식장에서나 만난다.   늘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게 만드는데 내가 그를 찾을 이유는 별로 없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친구 1은 어디에 있든 보고싶겠지만 소식이 없어도 궁금해 하지 않을 테고 친구 2는 이것저것 서로 하고 싶은 얘길 할 수 있을 거다.   친구 3은 그때 쯤이면 아예 친구가 아니겠지. 한쪽에서 너무 무거운 압력을 받으면 우정은 깨진다.                         (크니드, 독일의 문장가, 1752~17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