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장사 없다더니 연일 계속되는 술에 지쳤나보다.
주위의 유혹을 끊고 일찍 집에와 테레비 앞에 누웠다.
보다가 졸다가 깨다가 하며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얼핏 시간을 보니 자정이 넘었다.
"뉘여?"
약간은 잠에 취해 묻는 말에 짜증이 살짝 실렸다.
친구였다. 웬일이지.
이 야심한 밤중에.
"여기 영등폰데 좀 나오지 않을래?"
"영등포? 거긴 왜?"
"아, 그럴 일이 좀 있어서... 혼자 마셔"
목소리가 풀렸다. 제법 마신 모양이다.
근데 뜬금없이 영등포라니. 외곽에 사는 놈인데.
그러다 얼핏 머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맞아. 그거야.
혼자라면 뻔하지.
필시 여자한테 채인거구만.
여자하고 삶은 고구마는 살살 달래서 먹어야 한다는데 <-- 이거 동x 말
짜식, 무대뽀로 덥썩 먹으려니 되나. 입만 데지.
채인거라 생각해선진 몰라도 목소리가 애절하게 들렸다.
가서 위로해야겠고마. 칠칠맞은 놈.
"알았어. 기다려"
이르고는 주섬 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는 째려보는 집사람 눈을 피해 집을 나섰다.
한길에 나와 택시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여자가 어디 한둘이냐' 하며, 위로 톤으로 발성 연습을 하고 있는데...
삐리리리.... 핸드폰이 또 울렸다.
그 놈이었다.
"뭐 그리 급해. 가고 있다니까"
"야, 여기 대전이거든?"
"뭐? 웬 대전? 아깐 영등포라며?"
"아, 아깐 술 내기가 걸렸었거든..."
얘긴즉슨 지 친구들 여러명이서 술값내기를 했단다.
이 시간에 아는 친구한테 전화해서 나오는지 안나오는지.
딴 애들은 다 빠꾸 맞았는데 지가 1등 먹었댄다.
나한테 일등턱을 쏜다나 어쩐다나.
쓰벌놈. 그건 그렇다치고 이거 난 뭐냐고.
여자 불감증이 이해가 갔다.
막 오르려 하는중에 싹 끊겼을 때의 그 허전함.
그게 욕구불만이고... 그러다 불감증 되는거지.
난 애초에 술 생각이야 없었지만...
그런데 싹 잘리니 갑자기 없던 술 생각이 피어오른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가로등 불빛받아 빗방울이 반짝인다.
불장난하면 오줌싼다는게 맞아.
촛불 장난하니 비 내리잖아. 하늘 오줌 말야...
비오면 외로움 타고 외로우면 술 생각나지.
술마시면 여자생각나고 여자 생각나면 불장난하고싶고.
일종의 연쇄반응이랄까.
빙빙도는 불가항력적 순환 싸이클.
하여튼 비를 핑계삼아 근처에 있는 단골 호프집엘 들어섰다.
주인에게 몇시까지 영업하냐고 묻는데...
"어... 형이 웬일이유?"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잘 아는 술고래 후배였다.
반가운 김에 얼른 그리로 가서는 맞은편에 앉았다.
혼자 외로이 마시는 것보단 대작 친구 있는게 훨 낫지.
"너는 웬일이냐?"
"난 술 안마시면 집에 못들어가요"
"왜?"
"그럴 일이 있거든요"
"그래? 적당히 마셔 임마. 아예 술 끊든가. 오늘은 빼고"
약간은 뻥도 쎈 이 놈.
전에 뭐라더라.
애기가 어렸을때 아침에 열나고 얼굴이 벌개서 업고
병원에 갔단다. 그런데 병원 도착하니 말짱하더란다.
집에 오며 가만 생각해보니 지가 새벽에 엄청 취해서
마누라 젖빤걸 애기가 같이 빨아 취했던거 같다나.
놈이 내게 잔 가득히 백주를 따뤄준다.
같이 잔을 들어 건배를 외치고선 한모금 쭉 들이켰다.
맥주는 역시 이 맛이야.
첫잔이 들어갈 때, 뼈를 녹이듯 시원하면서도 톡 쏘는 청량감.
잠시 맛을 음미하듯이 입을 쫑그리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난 입가에 묻은 거품을 핥으며 물었다.
"요새도 같이 빠나?"
"에이.... 애는 젖병 빨아요"
ㅎㅎ... 하긴 그려...
애가 싫어할 거야. 담배 냄새까지 배었을테니.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시간이 제법 지났다.
이놈 마누라 성질을 알기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너 이리 늦어도 괜찮냐?"
"그럼요. 버릇을 싹 고쳐줬지요"
"전에 문 잘 안열어준다고 그랬잖아"
"그랬죠. 근데 한번은 문 안 열어주길래 잤죠"
"어디서? 문밖에서?"
"아뇨. 엘리베이터 안에서요"
난 녀석의 듬성대는 머리를 쳐다보며 혀를 찼을 주부들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입가에 실소가 번졌다.
"아침에 물벼락을 맞고 깼지요"
"누구한테?"
"마누라요. 아침에 방송을 했다네요. 관리실서"
"어떻게?"
"남편 분실하신 분은 찾아가라고"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한다.
은근히 신이 난 모양이다.
"나중에 마누라 말이..."
"..."
"찾으러 나온 아줌마들끼리 서로 머쓱해졌다나"
그 광경이 눈에 선하다.
난 혀를 끌끌 차면서...
"하여튼 짜식, 철딱서니라고는....."
"소문이 났는지... 다음엔 발자국 소리만 나도 얼른 열어줘요"
어쨌든 그거 좋은 방법이긴 하군.
대가 센 마누라 길들이기에는...
소록소록... 내리는 비는 내릴지라도...
여기 우리 술이 있음에...
빗소리 들으며 술잔이 서너배가 더 돌았을까.
갑자기...
"저 얼굴 빨개요?"
"응. 제법 불그레 한데"
"그럼 이만 끝내시죠"
"갑자기 왜그래? 난 한참 오르려는데"
"더 늦으면 집에 못 들어가요"
"아니, 문은 잘 열어준다며?"
"사실은..."
어?날 마누라가 현관 열쇠에 홍채 인식 시스템을
설치했단다. 맨날 늦는 남편 땜에 잠을 못 잔다고.
"그런데 술먹고 홍채를 등록했더니 맨눈으로는 문이 안열려요"
"왜?"
"색깔도 감지하나봐요"
"그렇게 예민해? 그거 참..."
"그런데 눈이 너무 빨개도 작동 안되더라고요"
집에 들어가려면 홍채를 알맞게 칠해야한단다.
적정량은 맥주 2,500 ~ 3,000 cc.
"매일 그리 먹고 어찌 사냐?"
"그러게요. 앞으론 안약을 사서 물감섞어 바르던가 해야죠"
"어쨌든... 끝내자는 핑계로는 딱이구먼"
하며 얼굴을 쳐다 봤다. 그 얼굴에 언뜻 그늘이 스쳤다.
후배는 대답 대신 씁쓰레 웃는다. 그러더니...
"실은 어제가 결혼 기념일인데요"
"그래서?"
"까먹었었거든요. 집에 오는데 전화받았죠"
"마누라한테?"
"예. 화 만빵내더라구요. 맨정신에는 도저히 못보겠어서..."
"허..."
"아마 지금쯤은 자겠지요. 몰래 들어가 누워야지요"
약간은 풀린 눈에 고단함이 배였다.
언뜻 마누라 발치에 쪼그리고 자는 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긴 그게 어디 그 만의 일이랴..
일이다 뭐다 안팎으로 치이는 남자의 숙명일진대.
어느새 비가 세차졌다.
진한 어둠 속에 빗줄기가 후두둑 유리창을 두드린다.
얼핏 노래소리가 들렸다.
여태 빗소리에 묻혀 있던 노래가...
"낮부터 내린 비는....
이 저녁 유리창에 슬픔만 뿌리고 있네..."
맞아, 저 비가 우리에게로 다가올 때는
슬픔일 수도 있구나.
유리창을 따라 흐르는 비...
어쩌면 그 비가 그대로...
내 가슴에도 마냥 흐른다.
왠지 모를 아픔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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