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속이는건 대개 사기이거나 불순한 목적일 터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선의의 목적일 수도 있다.
남에게 해를 주지않는 선의의 거짓말이 있고 적당한 거짓말이 깃든 칭찬은
당사자의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다.
눈속임도 그런 범주에 들 것이다. 여자의 화장은 본인의 자신감도 높이겠지만
보는 사람도 즐겁게 해준다. 변장 정도면 예외겠지만.
어쩌면 머리 염색이나 가발도 그런 부류이지않을까 싶다.
약점이라기엔 뭐하지만 그럼으로써 얻는 적당한 자기 만족과 남에 대한 배려성도 있는.
언젠가 사업하는 후배한테 들은 기억이있다. 대머리라 나이 들어보여선지 사업하는
상대방이 어려워하고 접대를 기피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가발을 쓰게됐다고.
나는 우연히 동료 따라 가발집 들렀었다. 게서 한번 써보라는 주인 꼬드김에 얼렁뚱땅
쓰게됐다. 젊어뵌다는 입발림에 속아서.
가발한 날 왠지 멋적어서 애들에게 벗을까 말까 물어보니 그대로 쓰라는 답이 왔다.
애비가 나이들어 뵈는건 싫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가발 사용후 불편함은 별로 없었다. 있다해야 어쩌다 은행서 신분 확인시
대머리 주민증 사진과 대조하며 본인 맞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는 정도랄까.
그러면 '벗어볼까요?' 한마디 하면 됐다고 손사래치는거였다.
그런데 몇개월 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왠지 머리가 서늘하여 위를 만져봤더니 가발이 벗겨진 거다.
잠버릇이 좀 험한지라 방안을 뒹굴다가 어디 부딪혀 벗어진듯 했다.
마침 휴일이라 밖에 나갈 일도 없기에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이참에 머리를 시원하게 감고 아침 식사 후 테레비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옆으로 누워 코메디 프로를 섭렵하며 키득거리다가...
잠깐 졸았었던듯 하다.
잠결에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난 얼른 현관에 나가 문을 열였다.
반장 아줌마였다.
오다가다 길에서 두어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XX 엄마 계세요?"
"아뇨. 좀 아까 밖에 나갔는데요"
"그러면... 주인 아저씨는 안 계세요?"
"예? 전데요. 왜요?"
반장 아줌마가 잠시 내 얼굴을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아, 죄송해요. 전 형님인 줄 알고..."
내게 퍼뜩 그 생각이 떠올랐다. 뭐 그렇다고 죄송할것까지야 있나.
사람 못 알아본게 죈가. 난 멋적게 웃으며...
"그런데 왜요?"
"저, 반상회 꼭 참석하시라고..."
하더니 갑자기 입을 손으로 가리더니 '킥'하며 얼른 뒤돌아간다.
이런 것도 변장이랄수가 있는지 몰라. 본색을 드러내는 것도.
거실에 들어와 거울에 머리를 숙여 쳐다 봤다.
제길. 시원히 잘 생겼구먼 왜 웃고 오바하는거여.
이젠 초인종 울려도 절대로 나가나봐라 다짐하며 다시 테레비 앞에
누웠는데 얼마나 봤을까.....
"릴릴릴... 릴릴릴..." 핸드폰이 울렸다. 친구였다.
"너 여의도 나올래?"
"왜?"
"야, 내가 친구한테 점심 살 일이 있는데 나와"
신세진 친구한테 밥산다는 거였다.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밖에 나갔다가 바람불면 어쩌나... 바람불어 좋은날이란 책은 있지만.
"나 좀 곤란한 게..."
"무슨 일인데?"
"머리 벗겨질까봐"
"그거 벗겨진다고 누가 신경 쓰나. 내가 술 산다니까"
공짜, 공짜라... 생각하다가 난 언뜻 표어가 생각났다.
'가는 처자 잡지 말고 오는 공짜 막지 마라'
맞아. 이 공짜 한번 가면 언제 오리.
난 부리나케 가발을 덮어쓰고는 핀으로 끼워 느슨하나마 고정시켰다.
그리곤 머리를 한손으로 누르고 바람을 가르며 날았다.
뭐 최악이랬자 쪽팔리기밖에 더 하겠냐구.
하긴 더 팔릴 쪽이나 있으랴만...
여의도에 셋이 모여 생태탕에 소주를 곁들였다.
그리곤 밖에 나왔을 땐 아직도 해가 창창했다.
난 친구에게 살짝 가발을 들어 보여주고서는...
"나 이리 노력했는데. 설마 이걸로 끝은 아니겠지?"
내 분투가 먹혔는지 결국 니나노 비슷한 집으로 2차를 가기로 했다.
난 아무래도 머리가 불안하길래 스캇치 테이프를 샀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친구를 끌고가서 테이프로 붙여달라고 부탁했다.
몸 흔들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벗어지면 안되지.
2차에서는 동동주를 주거니 받거니...
어쩌면 옆 아가씨 향수 냄새에 더 취기가 돌았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마음은 많이 느슨해졌다.
그런데 옆에 앉은 아가씨가 갑자기...
"오빠, 여기 검불 붙었네"
하며 내 머리에 손을 대더니 확 잡아챘다.
내가 말릴 사이도 없이 가발이 저만치 날아갔다.
"어어.." 내가 말했다. 나 조심하랬잖아.
놀라기는 아가씨가 더 놀란듯 했다. 그리곤 허둥거리며
"그 그게.... 그 뜻이었어요? 전 티끌붙은줄 알고..."
말인즉슨 스카치 테이프가 밖으로 좀 삐져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가발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곤 아가씨한테 테이프를 주며
"저거 1초내 원위치" 하고 명령했다.
잽싸게 집어든 아가씨가 손을 잠깐 제지한 후 난 다시 말했다.
"기왕에 다 들킨거 맛사지좀 하고 덮지 그려"
아가씨가 잠시 키득대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나름대로 머리를 맛사지 한후
가발을 머리에 붙여놨다. 난 아가씨한테 한잔을 부어 따뤄주며...
"아가씨, 내 실체를 봤으니 책임져"
"예? 어떻게 책임진대요?"
"델구 살던가"
"에이"
'그럼 즐겁게 해주던가. 아니면 아주 비밀스런데를 보여주거나"
아마 데리고 살긴 싫었던 모양이다. 좀 생각하는 눈치더니...
"지금 비밀스런데 보여줄순 있는데요"
"그래? 어디?"
"제 뱃살요"
"에이, 거기 말고. 쫌만 더 써봐"
어쩌면 아가씨가 노래방까지 따라 온건 그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부루스를 출때 출렁이는 젖가슴이 살짝 살짝 닿는 짜릿함이라니.
난 그게 고의였었다고 믿는다. 보시랄까 보상이랄까.
노래방에서 나왔을 때는 많이 어두워졌다.
이미 술은 꼭지까지 돌았다. 난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대고 난 이내 졸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사가 말했다.
"거의 다 온거 같은데요. 내릴데가 어디죠?"
난 얼른 눈을 뜨고 밖을 바라봤다. 우리 집 근처를 막 지나고 있었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 나는 기사 귀에 대고 소리쳤다.
"여기요. 세워주세요"
그러자 빽미러로 흘끗 돌아본 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갑자기 쏠리던 몸때문에 내 이마는 기사의 콧잔등이를 세게 부딪혔다.
"어... 누, 누구세요?"
"예?"
기사가 승객보고 누구냐고 묻는 수도 있나?
이거 이름을 대야하나 하고 머뭇거리는데 기사가 갑자기...
"아, 됐어요. 딴 사람인가 귀신인가 해서... 만오천원 나왔네요"
내 눈에 바닥에 굴러 떨어진 가발이 보였다. 머리를 끄덕이며 졸다 떨어진
모양이다. 난 잔돈을 거슬러받은 후 가발을 집어들고 나왔다.
쌩하고 떠나는 택시 기사가 코를 잡고 큭큭대는게 보인다.
'쓰벌놈. 대머리 귀신도 있나' 중얼대며 난 머리를 쓰다듬었다.
콧잔등이 맞은 그 놈은 나보다 더 아프겠지 싶으니 괜히 통쾌해졌다.
아예 콧잔등이를 뭉개버릴걸...
그런데 며칠 전이었다.
신문을 넘기다가 눈에 확 띄는 글이 들어왔다.
미국에서 발모 효과가 있는 레이저 빗이 곧 시판된다는 내용이었다.
FDA(식품의약국)의 승인을 받았다니 효능이 입증된 모양이다.
좀 더 일찍 나올것이지. 이런 뒷북이라니. 내 일이 늘 그렇긴하지만..
하다가 지금에라도 나온게 어딘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요새 머리많이 빠진다고 걱정하던 큰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댕기머리 샴푸다 무슨 특제 샴푸다 머리에 좋다는 샴푸 타령이던데.
대머리가 유전이라는걸 들었는지 은근히 원망하는 눈치던데 말이다.
레이저 빗 하나면 다 해결되겠군...
몇년 후 그 레이저빗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때를 상상해본다.
젊은 처녀가 머뭇거리며 약국에 들어온다.
처녀 : 레이저빗 하나 주세요.
약사 : 본인이 쓰실건가요?
처녀 : 예
약사 : 머리가 무성하신데... 쓸 필요 있겠어요?
처녀 : (부끄러워하며) 실은 아랫 머리가 듬성대서.....
약사 : 아... 알겠어요. 여기 여러 종류가 있는데요.
처녀 : 손잡이가 가지같이 생긴 이건 왜 비싸요?
약사 : 다용도거든요.
처녀 : 아, 그래요? 그거 주세요.
약사 : 그건 수동식이고. 이 쪽에 더 좋은것도 있는데요.
이 오톨도톨한 자동 바이브레이터 레이저빗...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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